갈현동
전해져 오는 말로는 이 일대에는 칡뿌리가 많아서 갓을 만드는 원료가 되어 왔기 때문에 칡고개 또는 칡넝클고개로 불러 왔고 또 이 근처에는 박석고개라고 불렀던 곳도 있어서 구릉이 많았던 곳이다. 1989년 6월 1일 갈현동은 갈현1동과 갈현2동으로 분동되었다. 관내 옛지명으로는 갈곡리, 온수리, 효경동, 좌월, 궁말, 버리고개 등이 있는데 그중 좌월, 궁말, 버리고개의 지명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현 대성고등학교 일대에 충신들이 퇴직 후 기거하던 곳으로 밝은 달을 쳐다보며 임금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빌었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궁말 - 갈현동 선진운수 종점일대궁궐에서 일하던 궁녀들이 나이가 들어 일할 수 없게 될 때 궁궐에서 10리내에 거주하도록 하였던 바, 늙은 궁녀들이 살았다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버리고개(벌고개) - 갈현동 308번지 일대조선시대 왕릉인 명릉에 관한 유래로서 조선 19대 왕인 숙종이 별세하자 묏자리를 서오릉으로 정하여 308번지에 있는 고개를 넘어 하관을 하라고 지관샌님이 하관샌님에게 명하였으나 하관샌님이 이를 어기고 고개를 넘기전에 하관을 하자 하늘이 노하여 천둥번개가 치고 무수한 벌떼가 나타나 하관샌님을 쏘아 죽였다해서 그후로 벌고개(버리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재건축 중인 갈현시장 앞 모습과 그 전의 갈현시장 입구의 모습
구산동
행정 동사무소로는 처음에 주위의 대조동, 불광동, 갈현동과 함께 대광동사무소에 속해 있었으나 점차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1973년부터는 갈현동과 함께 떨어져 나와 갈현동사무소를 설치하였고 1975년 다시 분리되어 구산동사무소를 독립시켰다. 그러나 지역이 넓지 못해 갈현동 지역을 상당부분 포함하여 12m 도로와 비봉능선을 경계로 하여 관할구역을 삼고 있다.
구산동 동명은 이 마을 건너편 산이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산에 거북받침의 ‘인조별서유기비’가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구산동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에 해당하였다. 고종 4년(1867)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북부 연은방 私契에 속하였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北署 연은방 사계 노지동・구산동이 되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를 5부 36방으로, 성외를 8면으로 개정할 때 경성부 은평면 노지동・구산동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산리가 되면서 현재의 구산동 범위가 형성되었다.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로 서울시에 편입되어 서대문구 구산리가 되었으며, 1950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조례 제10호에 의해 서대문구 구산동이 되었다. 1979년 10월 10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은평구가 서대문구에서 분구되면서 은평구 구산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구산초등학교 전경
구파발동
1973년 7월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진관동 관할이었으나 1975년 10월 1일 진관내·외동으로 분활될 때 진관내동에 편입되었다.
관내 옛 지명으로는 물푸레골, 방아다리골 등이 있는데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구파발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한양의 관문으로 각종 주막과 대장간이 많이 있었으며 특히, 이곳에서는 장인이 운영하는 대장간에서 농기구(망치, 낫 등)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부속되는 자루로 물푸레나 무를 사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옛날 이곳에 물푸레나무가 무성하여 이 부근의 마을을 물푸레골이라 칭하였다.
방아다리골 - 구파발 125번지 일대마을의형태가 마치 곡물의껍질을 벗기는 방아다리처럼 골짜기가 길게 뻗어 있어 방아다리골이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이다.
또한 개화기 이전까지 방아다리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구파발역 입구 구파발 인공폭포
녹번동
이 지역은 1949년 8월 3일에 공포한 대통령령 제159호에 따라 서울에 편입되어 녹번리로 불러 오다가 1950년 3월 26일 서울특별시 동리이름 개정시 녹번동으로 바뀌었다. 동사무소의 변천은 1945년 4월 18일 주변의 응암동, 역촌동, 신사동과 함께 4개 법정동이 합하여 녹신동사무소로 되었다가 1973년부터 독립되었다. 관내 옛 지명으로는 양천리(돌산리)웃물골, 안정박골, 도살장터, 패일재, 산골고개 등이 있는데 이중 양천리, 패일재, 산골고개의 지명 유래를 보면 다름과 같다.
이곳에서부터 북으로 신의주, 남으로는 부산까지 1,000리가 되어서 양천리라 부르게 되었고 돌과 바위가 많아 돌산리라 부르기도 했다.
패일재 - 녹번동 86번지 일대비가 오면 대단히 질고 빗물로 인해 도로가 파여 패일재 또는 파일재라 부르기도 했다.
산골고개 - 녹번동 4, 5번지 일대돌과 바위가 많은 산골고개의 산골은 옛부터 뼈가 부러졌거나 약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 곳으로 뼈의 집착, 골절 응고에 효력이 뛰어난 훌륭한 치료제라 하여 지금까지도 산골의 약효가 아주 유명하다.
2014년 9월 27일(토) 녹번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살고 싶은 우리동네『제8회 양천리골 문화축제』
-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News Network 에코데일리 (www.ecolover.co.kr) -
대조동
서울에는 옛날에 남산골, 다락골, 밤섬 등 구전으로 불려 오던 것을 후에 한역을 해서 남산동, 누각동 혹은 율도라 했는데 대조동 역시 이 범주에 속하는 동 이름중에 하나다. 당시 이곳은 산골이었고 특히 대추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여 오며 근처에 갈고개, 박석고개 등이 있다. 관내 옛 지명으로는 대추마을(대추말)이 있으며 지명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대추나무가 많았으며 대추나무의 성장속도가 빠르고, 열매가 많이 열렸다고 한다.
대추나무
불광동
불광동은 1970년 5월 18일 불광1동과 불광2동이 분리되고 그후 인구가 증가하여 1985년 9월 1일에 불광2동이 다시 불광2동과 불광3동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내 옛 지명으로는 독바위골, 수리봉, 돈노리, 연신내, 어수물터, 새장골, 박석고개 등이 있는 이중 독바위골, 연신내, 박석고개의 지명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폭군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해 인조가 반정을 일으켰던 그 당시 불광동(현재 각황사 절터)에 원두표 장군이 은거했는데 인조가 원두표 장군에게 도움을 청하여 인조반정이 성공하였다. 그후 인조가 원두표 장군의 덕을 기르기 위해 원두표 장군이 거처하던 곳 일대에 덕바위골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덕바위 골을 독바위골이라 부르고 있고 또 일부에서는 돌이 많아서 독박골, 항아리를 엎어 놓은 모양이라 해서 독박골이라 부르는 주민들도 있다.
연신내 - 현재의 연신내 사거리 범서쇼핑 인근연신내는 조선조 연서(延曙 또는 迎曙)역이 있던 곳의 지명인데 이는 연서역 주변을 흐르던 개천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연서역은 옛 경기도의 5도찰방 중의 하나인 영서(迎曙)의 도찰방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인근에 위치한 고양의 벽제. 파주의 문산. 장단의 동파. 개성의 청교(靑郊). 준예. 풍덕의 중련(中蓮) 등 각 역을 관장 하였다.
박석고개 - 은평구 불광동 479번지 일대갈현동과 불광동을 양편에 끼고 구파발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이 근방 궁실 전답으로 나가는 사람에게 땅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 돌을 깔았다고도 하며, 이 고개가 서오릉의 길목이 되는데 낮으므로 이 산맥이 깎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박석을 깔았다고도 하며, 이 고갯길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의 내왕로로 산에서 흐르는 물이 통행에 불편을 줌으로 조정에서 상석 크기의 돌을 깔았으므로 박석고개가 되었다고도 한다. 지금은 넓은 아스팔트도로가 통일로를 향해 훤히 트여 있다. 박석현이라고도 한다.
10월18일(토) 11시부터 불광사 앞 마을공원에서 열린『제8회 밥할머니 호극기원제』
올해로 8회를 맞는 “밥할머니 호국기원제”는 임진왜란 당시 기지를 발휘해 왜군의 진격을 막고 조선군을 지원한 우리 마을의 자랑스러운 선조인 밥할머니를 기리는 행사이다.
역촌동
역촌동은 지금의 예일여고 동쪽 너머 마을의 옛지명인 역말(역마을)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역말은 역(驛)기능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마부, 역마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특수 동네였다. 이 지역은 1955년 행정동제가 실시될 때는 녹번동, 응암동, 신사동과 함께 녹신동 관내였고, 그후 녹신동에서 분리되어 신사동과 함께 역촌동사무소로 분리되었으나 1975년때에는 다시 신사동도 독립되어 역촌동사무소는 법정동계만 관할하게 되었다. 1985년 역촌동은 역촌1동과 역촌2동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내의 땅이름과 관련된 이야기는 인조대왕 별서유기비, 김류, 도당나무 이야기, 구릉고개, 장대곶산(감나무산), 토우물(土井里),나무장승,역말, 장수마을, 두레 등이 있다.
인조별서 유기비가 있는 전각 (서울 인조별서 유기비 (서울 仁祖別墅 遺基碑) / 보물 제1462호)
소재지 : 서울 은평구 역촌동 8-12
이 석비는 조선왕조 제16대 임금 인조(仁祖, 1623~1649)가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렀던 별서(別墅)를 기념하고자 숙종 21년(1695)에 세운 것으로 인조반정에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그 현장을 증명해 주는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
응암동
응암동의 동쪽으로는 녹번동의 일부와 백련산을 사이에 두고 서대문구와 경계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증산로를 사이에 두고 신사동, 증산동, 북쪽으로는 역촌동, 불광동 그리고 남쪽으로는 서대문구와 경계하고 있다. 행정동으로는 처음으로 녹번동, 역촌동, 신사동까지 합해 녹신동사무소 관내로 삼았으나 그후 인구증가로 응암동은 따로 떨어져 나와 1동과 2동사무소로 개설되었다. 1975년 10월 1일 3동사무소를 하나 더 늘여서 3개 동으로 나누어 졌고, 1988년 7월 1일 응암 2,3,4동으로 각각 나뉘어 졌다. 관내의 땅이름과 관련된 이야기는 냉정골약수(冷井谷藥水), 미국인서 대위(大尉)전사기념비, 늘미(臥山),포수말, 매바위(응암:鷹岩),올무지고개, 백련사(白蓮寺)등이 있다.
해발 215m의 백련산 기슭 바위 위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 장막을 치고 포수들이 모여 회의와 휴식을 취하여 기거했던 곳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 한다.
냉정골 - 응암동 35-106 ~ 61-3번지 일대현재 녹신약수터가 예전에는 냉정약수터였다. 옛날부터 이 골짜기를 냉정골이라 불러 왔는데 이곳의 약수는 광물질이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어 위방병 환자가 먼 거리를 마다않고 찾아 들었고 특히, 피부병에는 특효라고 소문이 났으며 약수는 아주 차서 여름이면 피서인파가 이 부근 계속에 장막을 치고 더위를 피했다고 한다.
매바위 - 응암동 231-121 일대왕의 일행의 사냥터로서 커다란 바위가 매가 앉은 모양처럼 생겨 매바위라 불리었다.
응암2동 주민센터 앞의 '매바위의 유래'석이다.
증산동
원래 증산동은 '시루 증(甑)'자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시루는 밑이 항상 뚫려 있어 재물이 모이지 않고, 항상 가난하게 살게 된다하여 고종황제에게 땅 이름을 시루 증(甑)자 대신 비단 증(繒)자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1955년 남가좌동과 북가좌동까지 합쳐 증가동으로 사무실을 만들고 그 관할 하에 두었다가 인구증가로 남가좌동은 떨어져 나가고 북가좌동사무소로 개칭되어 증산동, 북가좌동 둘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후 1975년 북가좌동은 서대문구로 편입되고 증산동만 남게 되었다. 관내의 땅이름과 관련된 이야기는 시루, 얼갈이 배추이야기, 태봉(胎峰),개춧굴(개춘굴,開春谷),하마비(下馬碑)터, 까치내 고개(성황당고개), 쪽지개골, 분토굴(粉土굴), 나씨집촌(羅氏集村), 가재울, 증산동 도당제(都堂祭)등이 있다.
옛부터 이 일대 산에서 희고 고운 흙이 출토되었다. 절구에 벼를 찧을 때 흰흙(분토)을 넣고 찧었으며 그렇게 하면 쌀이 잘 찧어지고 희게 보이기 때문에 그 고을을 분토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까치고개수색과 증산동을 통하는 좁은 길이 있고, 양쪽에는 높은 산이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또 큰나무가 울창하여 까치가 유난히 많아 '까치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시루뫼 유래비
신사동
신사동(일명 새절)에 대한 옛 기록은 「동국여지비고」 및 「겸제도성대지도(兼齊都城大地圖)」에 있다. 이 기록에 신사계(新寺契)란 기록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전래되어 오던 고유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명칭인 새절이 신사동 200번지 부근에 있었다는데 누구에 의해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을 뿐더러 그 터의 흔적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곳은 1955년 응암동, 역촌동, 녹번동과 함께 녹신동사무소가 설치되어 그 관할 하에 있었으나 1973년 떨어져 나와 역촌동과 함께 역촌동사무소로 되었다. 1975년 인구증가로 신사동이 독립된 동사무소로 되었고, 1989년 신사동은 다시 신사1동, 신사2동으로 각각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내의 땅이름과 관련된 이야기는 고택곡(高宅谷), 왜골 약수터, 새력골, 홍살문집, 통정대부 김운배, 능안말, 풋나무골, 사라져 가는 개똥벌레, 축등(築嶝)등이 있다.
봉산에는 여러 개의 골짜기가 있고 그중 294번지 뒤편에 있는 것이 풋나무골로 전해 내려오는데 그 유래는 찾아볼 수 없으나 의미를 살펴보면 풋은 새롭다는 뜻. 골은 깊은 골짜기를 뜻하는 말로 새롭고 싱그러운 나무들이 울창한 매우 깊은 골짜기란 의미로 전해 온 것 같다.
고태골 - 신사동 300번지 일대고려말(정확한 왕.연대 미상) 고태라는 사람이 나라에 공을 세워 땅을 분할받고(지금의 상신초등학교 부근) 살았는데 자손이 없어 대가 끊기게 되었다. 그후 사람들은 여기를 고태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불광천변에 있는 신사동 유래비
수색동
수색동이라는 지명은 일명 '물치' 또는 '무르치'라는 옛 이곳 땅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말인 무르치는 물치라는 말에서 음이 변한 지명이다. 무르치는 수색역 앞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는 넓은 들 건너편에 위치한 마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장마철만 되면 물이 치어 올라 마을과 벌판 등이 온통 물 일색으로 변해 버린다고 하여 무르치가 되었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수색(水色)이 된것이다.
'무르치'라는 고유의 땅 이름 대신 수생리(水生里)로 기록되어야 했던 당시 우리의 한자 문화 속에서 땅 이름의 뜻보다는 늘상 불려왔던 우리말의 발음과 비슷한 물이촌(勿移村)으로 표기한 구암선생의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한백겸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예학(禮學)과 역(易學)이 뛰어난 학자였다. 원주의 칠봉(七峰)서원에 배향되었다. 수생리(水生里)는 1750년에 제작된 도성도(都城圖)에도 기록되어 있다.
1955년 행정동사무소가 설치될 때에는 다른 지역은 인구수가 적당치 않아 합하거나 양분되기 일쑤였지만 수색동 만큼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수색동사무소 하나로 존재하였다.
관내의 땅이름과 관련된 이야기는 구룡곶이(九龍串),수색역, 은평터널,말머리산(마두봉)과 모르지 등이 있다.
수색동 물빛 한마음 축제 2014년 11월 1일
진관내동
관내의 땅이름과 관련된 이야기는 구파발(舊把撥),옛날 지방 장사꾼, 역(驛)과 마패(馬牌),장전(長田),구파발무당, 일본인 학교(신은심상고등학교),한병사의 꾀 이야기, 금암다리(검보다리),금암기적비(黔岩紀蹟碑), 참(站),탑동(塔洞),물푸레골, 금계수탁 우물, 여기소, 방아다리골 등이 있다.
진관내동 습지입구에 서있는 표지판
진관내동 습지 1만6639㎡는 본래 논으로 사용되다 오랫동안 방치돼 습지로 변한 곳으로 창포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2급인 금개구리와 맹꽁이 등이 서식하고 있다
진관외동
관내의 땅이름과 관련된 이야기는 진관사(津寬寺), 삼각산(三角山,북한산), 못자리, 제각말(祭閣里), 거북다리, 제말, 젯말서당, 삼천사(三千寺), 은평노인종합복지관, 폭포동과 싱아굴, 행궁터(行宮址), 북한산성 축성공사, 섬 이야기, 마고정(馬雇亭), 마고정의 국사당, 밥할머니 이야기 등이 있다.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진관사의 전신인 神穴寺에 숨어 있었다. 그때 현종을 구해준 노승의 이름이 津寬祖師이며 그 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 이듬해 그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새로 절을 짓고 조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고 하였다.
진관외동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혈면 탑골, 삼천리골, 못자리골(못절터), 여기소, 마고정, 제각말, 잿말, 폭포동 등으로 불리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를 5부 36방, 성외를 8면으로 할 때 고양군 신혈면 진관외리가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이전의 고양군 신혈면과 하도면을 합하여 신도면을 만들면서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가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2596호로 구파발동, 진관내동과 함께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서대문구 진관내동이 되었다. 1979년 10월 10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은평구가 서대문구에서 분구되면서 은평구 진관외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진관사 전경
독박골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 큰 공을 세운 원두표 장군과 관련된 옛 이야기가 전해진다. 인조반정 직전 이 바위굴 근처에서 낯선 젊은이가 자주 배회하였다. 나무하러 간 동네 사람들이 이 모습을 “당신은 무엇하러 온 사람이오?” 하고 묻자, 그 젊은이는 “나는 염병이 걸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병을 고치러 왔소” 하는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이 염병이 옮을까 염려하여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게 되었다. 사실 이 젊은이가 바로 원두표 장군이었으며, 반정을 모의하였던 사람들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염병이 걸렸다고 둘러댄 것이었다. 이에 당시 인조반정 모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이를 모방하여 “이제 병 고치러 가세.”라는 말로 거사의 암호를 대신하였다고 한다.
북한산 불광사(佛光寺)는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작은 사찰이다. 은평구 불광동(佛光洞) 동명(洞名)의 유래는 '불광사(佛光寺)'라는 절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은평구에는 오래된 사찰이 많아서인지 사찰과 관련된 행정동명이 몇 개 있다. 불광사에서 유래한 불광동과 더불어 새절이 있었다고 전하는 신사동(新寺洞), 진관사에서 유래된 진관동(津寬洞) 등이다. 불광사는 비봉 아래 자리하고 있다. 인근의 비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출처]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북한산 불광사(佛光寺) | 작성자 지마
삼천리골(三川里谷)
조선시대 이름은 ‘三川寺洞(삼천사동)’으로 조선시대 고지도인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 三川寺洞이란 표기가 보인다.
삼천사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에 있는 절로 신라시대 원효가 흥국사 등과 함께 창건한 절이라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 한국학중앙연구원
폭포동(瀑布洞)
조선 후기 고지도인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 “香林瀑(향림폭)”이라는 표기가 보이고 있고, 폭포동 김해김씨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김시휘(金時輝) 묘표에 “楊州神穴面瀑布洞(양주 신혈면 폭포동)”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림사 뒤쪽 폭포들
제각말(祭閣里)/잿말
진관외동 52번지 일대(현재의 은평뉴타운 3-2지구) 잿말의 어원은 철종대왕이 조부인 은언군의 시제(時祭)를 지내러 왔다가 이 일대의 성황당 고개에서 편히 쉬었다고 하여 ‘식영(息寧)고개’라는 지명이 생겼고, 재말이란 바로 식영고개 넘어 마을, 즉 재 넘어 마을이라 하여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혹은 영산군파(寧山君派)의 재실(齋室)이 있었다고 하여 생겨난 지명이라고도 하는데, 일제시대인 1916년(대정 5년)에 작성된 고지도에 ‘齋村(재촌)’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지금은 은평뉴타운으로 변한 예전의 제각말 부근 모습
마고정(馬雇亭)
마고정의 유래는 조선시대 후기에 역마고립제(驛馬雇立制)라 하여 민간의 말을 세내어 국가에 빌려주던 고마청(雇馬廳)이 와전되어 잘못 전해진 것이다. 지금의 은평뉴타운 2지구(3단지)에 고마청이 있었다고 해서 유래한 지명이다.
옛날 중국사신들이 상소 등의 일로 중앙에 들어 갈 때 조정에서 입궁해도 좋다는 소식이 있을때까지 이 마을에 말을 매어두고 숙식을 시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여기소 경로당
우물골
과거 뉴타운 공사 전 이 마을에는 명성황후의 원당(願堂)인 금성당(錦城堂)이 있었는데, 현재까지 잘 남아 있다. 금성당은 1880년대 초반 이전에 지은 금성대군(1426-1457)을 주신으로 모시는 굿당으로 2008년 7월 22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258호로 지정된 바 있다. 같은해 11월에 제1회 서울 구파발 금성당굿 행사를 열어 왕실굿 을 재현.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행사가 됨.
금성대군은 단종의 숙부로 조선 제6대왕인 어린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순절한 인물. 세종의 여섯째 왕자.
금성당 전경
물푸레골
과거 구파발 대장간에서 농기구에 쓰이는 자루로 사용하던 물푸레나무가 많이 서식하여 불려지게 된 지명이다.
예전부터 이곳에는 물푸레나무가 많이 자랐고 또 그 질이 좋아 이웃 구파발 대장간에서 도끼, 호미, 낫 등 농기구에 쓰이는 자루로 인기가 대단하였다.
당시 이 마을 뒤로는 물푸레나무가 대여섯 줄 정도 길게 이어져 있었다. 지금은 물푸레나무들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아직 이 근처를 ‘물푸레골’로 부르고 있다. 과거 이 골짜기에 물푸레나무가 천지를 이뤄 이런 이름이 전해 왔다는데 지금 물푸레나무의 자취를 찾기 어렵다.
물푸레골은 은평뉴타운 105만평 마을 중에서 계곡을 따라 가장 길게 들어선 마을이다.
1950년 6.25전쟁 후 피난민이 정착하면서 물푸레골 따라 길게 마을이 들어섰다고 한다. 물푸레골 상류는 은평뉴타운이 건설되면 자연공원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진관내동 75번지에는 수령 100년 이상된 물푸레골 당나무가 있다고 한다.
[출처] 지역정보포털
금성당 전경
방아다리골
곳 마을의 형상이 마치 디딜방아의 다리처럼 골짜기가 Y자형으로 길게 뻗어 있어 생겨난 지명이다.
현재 최첨단 은평환경플랜트(쓰레기 소각장)이 들어선 자리의 예전의 모습
못자리골(淵寺里못절터)
옛날 이곳에 있던 절 경내에 커다란 연못이 있어 백성들이 ‘못절’이라고 불러왔으나, 이후 절은 없어지고 연못만이 남아 ‘못절터’라고 부르다가 다시 동명화 되어 ‘못자리골’로 불려졌다.
지금은 논으로 되어있고 그 옛날 절터임을 추측할 수 있는 기왓장이 간혹 출토되고 있으나 어느절 연못인지는 알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양주 연사리(淵寺里)로 표기되었는데, 은평뉴타운 전에는 마을 가운데 물이 고인 늪지인 못자리가 있었다. 마을 뒷산인 이말산(莉茉山) 칠원윤씨 동지중추부사 윤용(尹鎔)의 묘표에 인조 9년(1631년) “楊州郡神穴里澤寺(양주군 신혈리 택사)에 묘를 썼다는 기록이 보이고, 일제시대인 1916년(대정 5년)에 작성 된 고지도에 연사리(淵寺里)라는 표기가 보인다.
못자리골에 남아 있던 사신성황당 전경. (2009년 철거되기전 사진) 이 성황당은 옛날 중국으로 오고가는 사신들이 무사히 다녀오도록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던 사당으로 원래 무악재에 있던 것으로 현재 무악재 사신당이라고도 불리운다.
"1971년 통일로 도로확장공사와 90년대 아파트(현 서대문구 홍제동 청구아파트) 건설로 건물이 헐리고 방치되다 몇 년 전 현 당주가 선몽을 받아 진관내동 못자리골로 자리를 옮겼다. 성황당에 보관중인 <중국사신도(中國使臣圖)>, <삼불제석도(三佛帝釋圖)>, <최영장군도(崔塋將軍圖)>, <뒤주대왕도> 등 무신도 4점과 현판 1점이 서울시 문화재자료 27호로 지정
상림말(香林谷)
옛 이름은 ‘상리꼴’이다. 현재는 은평뉴타운 1지구가 입주해 있다.
은평뉴타운 1지구 입성전략
[출처] 매일경제 2007-11-09 기사
탑골(塔洞)
조선시대 이곳에 탑이 많았으므로 생겨난 지명이다. 현재도 흥창사(興昌寺)와 자씨각(慈氏閣) 등 불교관련 유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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