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 역사

은평구 슬로건
은평구 은평한옥마을

유래

석기시대부터 일부 지역에서 혈연을 같이 하는 씨족끼리 집단을 이루어 취락생활을 했던 은평구 지역은 한양(서울)의 일부로써 백제 때에는 위례성, 신라시대에는 신주,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산주로 부르다가 경덕왕 7년(757년)에 한주로 고쳤다. 조선 한성부(한양)의 하급 관아인 5부(지금의 구에 해당)는 중, 동, 서, 남, 북부였으며, 현재의 은평(恩平)지역은 이때 북부(北部)에서 성외(城外)인 연은방(延恩坊)과 상평방(常平坊)에 해당된 곳이었다.
은평(恩平)이란 명칭은 바로 이 두 방의 이름에서 한 자씩을 따서 유래한 것이다.

지형

조선시대 은평구 지역은 현재 은평구, 마포구, 서대문구에 이르는 도성 서부의 광활한 면적을 아우르고 있었다. 대부분 구릉으로 이루어져 배수는 양호한 편이어서 주택지구로 개발될 가능성이 충분한 곳이었다. 다만, 기온 분포에 있어서는 북서풍에서 사면 하강 기류에 의한 냉기가 유입되어,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온도가 낮은 저온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제한적이나마 농경취락이 가능했던 곳은 능선과 능선으로 감싸인 분지 또는 하천연변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교통

조선시대 은평구 지역은 교통의 길목으로 중요하다. 조선 왕조가 교류한 중국의 명과 청은 줄곧 북경을 근거지로 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육로가 발달하였다. 1년에 정기적 사행만 해도 4회, 그 밖에 수시로 임시사행이 파견되었으며, 중국에서도 그에 대응하여 사절을 보내왔다. 사행의 구성을 보면 정사, 부사, 서장관을 비롯하여 이에 딸린 인원이 300명 정도였으며, 이들이 타고 가는 역마와 중국에 보내는 예물을 실은 짐바리 말, 여행 중에 필요한 식량 및 물품 등을 싣고 가는 말을 합하여 대략 200여 필이 동원되었다. 즉 거의 달마다 한번씩 이 같은 대규모의 사행이 통과했다고 할 때 의주로의 번성함은 쉽게 예견될 수 있다. 도로의 중요성이 제고되면서, 도로의 관리를 위해 또는 교통의 편의를 위해 의주로 일대에는 역로망이 구축되고 역(驛)과 원(院)의 시설이 정비되었다. 즉, 한양에서 개성에 이르는 의주로 연변에는 교통을 제공하는 연서역, 벽제역 등의 역과 여행자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홍제원, 덕수원 등의 원이 설치되었다. 즉, 은평구 지역이 지형적으로 구릉으로 점철되었다고 하여도 교통의 중요한 길목으로서 의주로 향하는 길이 이 지역을 관통하고 있어서 일부 지역은 조선시대에 이미 택지화되고 인구가 밀집되고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서울로의 인구 집중이 심화되면서, 도성 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던 유민들은 현재의 서대문구와 은평구 등 서대문 밖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정착하여 갔다.

현재의 은평구

한일합방 후인 1913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으로 되었으나, 해방 후 서기 1949년 8월 대통령령으로 다시 서울시로 편입, 1973년 7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와 진관내,외리를 서울시로 편입하였고, 1979년 10월 1일 서대문구에서 분구하여 은평구(15개동)로 되었다. 1988년 5월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 2008년 6월 불광3동, 응암4동, 역촌2동이 인근동과 통폐합되어 11개 법정동에 16개 행정동(주민센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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